1928년 즈음에 있었던 일입니다. 21살의 한 남학생은 종로의 어느 목욕탕 앞에서 마주친 여자를 사랑하고 맙니다. (그의 이름은 김유정. 그녀의 이름은 박녹주였습니다.) 그녀는 그의 돌아가신 어머니와 많이 닮아있었다고 했는데요. 그렇지만 그녀는 그보다 3살 연상의 기생이자 이혼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쉽게 이뤄질 수 있는 상대는 아니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판소리를 하는 그녀의 공연을 보러 가기도 하고 수십통의 연애편지를 써서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했었다고 해요. 그렇지만 그녀는 이미 혼인을 한 경험도 있었고 학생이 기생에게 이렇게 구애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계속 외면을 했다고 하는데요.
그녀가 본인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자 그는 하지 말아야 할 행동들을 합니다. 막무가내로 집까지 찾아가서 사랑을 고백하기도 하고, 수십통의 혈서를 써서 보내고, 자기를 받아주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살해협박까지 일삼았다고 해요.
수십년이 흘러서 박녹주 명창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없었다고...
무슨 학생이 공부는 안하고 편지질이오?
학생이 기생과 무슨 연애를 하자는 말이오?
학생이 이러면 나도 가슴이 아프오.
공부를 끝내면 다시 나를 찾아 주시오.
눈치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박녹주에게 끈질긴 구애를 한 스토커는 봄봄, 동백꽃을 쓴 소설가 '김유정'이였습니다.
박녹주의 어린 시절
그녀는 1905년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박중근은 집안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노름과 술로 세월을 보낸 한량이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12살때 아버지는 판소리 명창들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을 보고 딸을 강제로 끌고가 박기홍 명창에게 소리를 배우게 합니다. 녹주는 소리에 재능이 뛰어나 금방 유명해져서 경상도 곳곳에 불려다니며 공연을 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생긴 수익은 아버지의 놀음값과 술값으로 사라졌다고 하는데요. 그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대구로 끌고 가 기생 수업을 받도록 합니다. 17세가 됐을 때는 원산 명창대회에서 만난 남백우라는 남자와 혼인해 첩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지만 남편 남백우는 "그대의 목소리는 만인이 되어야 한다."며 녹주를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18세 때 서울에서 가장 유명했던 명창 송만갑에게 판소리를 배우게 됩니다. 그 후 전성기를 보내던 중 스토커 '김유정'을 만나게 되죠.
김유정의 어린 시절
김유정은 1908년 지금의 강원도 춘천군 신동면 증리인 실레마을에서 부친 김춘식씨의 2남 6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잘나가는 부농이었지만 유정이 7살 되던 해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뜨고, 그 2년 뒤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가장이 된 형은 잦은 난봉과 가정 폭력을 서슴지 않아 잡안의 재산은 탕진되었습니다. 그로인해 갈 곳이 없어진 유정은 삼촌에게 얹혀 살게 되는데요. 이렇게 가난과 고독에 시달리던 시절에 어머니를 닮은 박녹주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스토커에 가까운 열렬한 구애는 3년 동안이나 계속합니다. 그러나 박녹주는 끝끝내 김유정을 차갑게 대했다고 해요. 게다가 그녀는 당시의 조선극장 지배인 신모씨와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1929년 3월, 박녹주는 자신을 배신한 신씨와 여전히 자신을 갈취하며 괴롭히는 부친 때문에 괴로워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고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죽지 않고 병원에서 깨어나게 되는데요. 그 당시 녹주의 병실을 지키던 사람은 김유정이었다고 합니다.
이듬해 여름이 되어서야 김유정은 박녹주를 포기하고 실레 마을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곳에서 박녹주를 그리며 술을 파는 여자들과 어울리는 일이 잦았다고 하는데요. 이 때 그녀의 나이와 비슷한 여자들을 유난히 좋아했다고 해요. 그리고 박녹주는 1931년인 다음 년도에 그녀를 경제적으로 후원했던 김종익과 재혼하였습니다. 한편 김유정은 고향에서 글을 쓰다가 1933년 방탕한 형 때문에 집안이 몰락하자 서울로 올라와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하게 됩니다. 당시 문학계에서는 김유정을 천재작가라고 하며 그의 행보를 주목하게 됐는데요.
이렇게 잘나가던 중 그의 나이 28세가 되던 해에 여류 시인인 박봉자라는 여인을 알게 됩니다. 그가 혈서를 쓰게 된 두번째 여인이자 마지막 여자로 남았는데요. 사실 김유정은 박봉자를 만난 적도 없고 얼굴도 몰랐습니다. 단지 그녀가 잡지 '조광'에 [글쓰는 남자를 남편으로 삼고 싶다]는 기고문을 남겼다는 이유로 혈서포함 100여통의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답장은 없었습니다.
알고보니 봉자에게 편지가 닿기 전 그녀의 오빠인 시인 박용철이 편지를 모두 숨겼다고 합니다. 후에 박봉자는 김유정도 잘 알고 지내던 평론가 김환태와 결혼하게 됩니다. 다음 해 1937년 3월 29일 김유정은 폐결핵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는 살아생전 '여성'이란 잡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고 하죠.
나는 숙명적으로...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그 버릇이 결국에 말없는 우울을 낳습니다.
그리고 상당한 폐결핵입니다. 매일같이 피를 토합니다.
... 나와 똑같이 피를 토하는 그런 여성이 있다면 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 단 사흘만 깨끗이 살아보고 싶습니다.
기사 내용처럼 그의 폐결핵은 심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박녹주는 어떻게 됐을까요? 그녀 역시 녹록치 않은 삶은 계속 되었습니다. 6.25가 터져 월북을 강요 당하기도 했으며, 전쟁통에 한쪽 눈을 실명하여 그 뒤로 검은 안경을 쓰고 다녔습니다. 음반 취입이나 무대 공연 등으로 많은 돈을 벌기는 했으나 사치에 심해서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남편과 자식 없이 외롭게 가난하게 살다가 1979년 면목동의 어느 단칸방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녀는 김유정이 떠나는 순간까지 자신을 잊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훗날 그를 회상하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마 내가 그이에게 너무 박절하게 대했던 벌을 늦게 받아서 평생 가난하고 기를 거 없이 살았지 않았나 싶소. ...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게 해 줄 것을 그랬지?
스토커 기질이 있었던 김유정과 그렇지 않았던 박녹주 둘은 모두 불우했던 가정환경과 지독한 사랑 때문에 평생을 괴로워했다는 공통점이 있네요. 거기에 생을 마감할 때 조차 쓸쓸했습니다. 저승이 있다면 부디 그 곳에서는 행복하셨으면 좋겠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인생을 시작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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